와썹맨눈썹맨 2021. 2. 7.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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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록빛 잎 새들이 가을을 향해 하나 둘 노랗게 물들어 변해 간다. 불일암을 둘러싼 산도 조금씩 가을 물을 들였다. 이 암자를 세운 법정스님은 강원도의 오두막으로 떠났고 상좌승만이 남아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불일암 앞뜰을 어느새 대숲이 들어서 더욱 동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벽에는 청산별곡이 예전처럼 붙어 있다.

 

살어이 살어리 랐다. 청산에 살어리 랐다.
머루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 랐다.

 

 그 아래 낮은 토방 위에 소박한 나무 의자가 덩그레 놓여있다. 어느 해던가 스님을 방문해 떡국을 대접받은 기억이 새롭다. 산사의 한적한 삶을, 황폐해 사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마르지 않은 샘물처럼 들려주던 ‘산방한담(山房閑談)’이 알려지면서, 스님은 찾아오는 불청객들로 인해 한가함을 빼앗기고 말았다.
 불일암의 빈 의자가 쓸쓸히 남아있는 이유는 ‘아름다운 외로움’을 선택한 스님의 결정 때문이다. 강원도의 두메산골로 떠나버린 빈 의자의 주인이 쉬이 이곳을 찾을 성 싶지 않다. 세상 사람들은 부귀영화의 유무로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로 삼는다. 심지어 신성한 종교와 교육의 장에서도 이런 가치관은 예외 없이 적용된다.
 나그네는 불일암의 빈 의자를 보면서, 하잘 것 없는 명성과 이해관계의 집착에 연연하는 우리 시대의 음울한 그림자를 반성해 볼 수 있었다.
 불필요한 것들을 버리지 못할 때 삶의 주변은 쓰레기처럼 점점 악취를 풍긴다. 동화 같은 아름다운 공간마저도 버리고 떠나는 그 차가운 결단이야말로 제자리의 ‘맑고 향기로운’ 삶이 솟아나는 비결이 아닐까.
 불일 보조국사의 자취가 서린 송광사 불일암의 불일은 ‘부처님의 빛’이다. 큰 절 송광사에서는 보조국사를 기리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발표자의 말 가운데 “본래의 선은 생활이어야지 생활과 격리된 선은 진정한 선이 아니라”는 말이 생생하다. 그렇다. 밥 먹고 청소하고 걷는 모든 일이 선이어야지, 일상의 삶을 따로 두고 생사를 건 수행만이 선은 아닐 것이다.

 


 불일암의 한 편에 16국사 중의 한 분이신 자정국사의 부도탑이 있다. 이 곳의 위치는 병이 치료되는 자리라고 전해진다. 풍수지리의 이치를 모르더라도 마음이 한가하면 몸도 알맞은 상태가 되어 좋아질 것은 지극히 당연할 것이다. 서로 빈 의자를 차지하려고 사는 세상에서 불일암의 빈자리가 가을동화처럼 아름답게 있었다.

 

이희재 명상기행집 옛절을 거닐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