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국사 무사전無私殿에서
겨울 산사에 부는 바람이 꽤 스산하다. 요란스런 여천 공단의 분위기는 흥국사의 앙상한 가지들로 우거진 길을 따라가면 금새 바꾸어진다. 영취산으로 둘러싸인 그 곳에는 이미 인적이 끊어지고 겨울바람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린다.
흥국사의 역사는 고려시대 보조국사로부터 시작하지만 남은 유적은 조선시대의 흔적들이다. 이순신 장군을 도운 의승병들의 자취를 쉽게 찾을 수 있으며, 남은 비석 등의 글에도 조선 특유의 유생들의 글투가 그대로 전해진다.
대웅전의 오른쪽에 여느 절과 같은 명부전이 있는데, 이곳은 무사전無私殿이라는 필자미상의 현판이 쓰여져 있어서 특이하다. 건물은 낡아 교체되었지만 앞면의 벽화는 매우 훌륭한 솜씨다. 발곡 하얀 얼굴의 인물이 피리를 들고 연주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구름 위의 모습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색상과 구도가 빼어난 작품이지만 아쉽게 일부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천왕이 무서운 얼굴로 양옆을 지키고 있어서 깜짝 놀랜다. 그러나 그 무서운 모습이 작은 규모의 목상이라 많은 사람들이 큰 코와 주먹 그리고 가슴을 만저 반들반들 빛나고 있어서 어느새 친근하고 해학적인 모습으로 변하고 만다.
안에는 지장보살이 봉안되어 있고 시왕들이 판관으로 앉아 있으며, 시왕들의 모습에서는 공정하고 무사한 판결이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마도 개인적인 인정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한 판정을 받아야 하는 곳이어서 무사전이라고 이름했으리라.
자업자득이라던가. 준엄한 인과법에는 도무지 너그러움이란게 없는 모양이다. 자신이 쌓은 대로 자신이 지은 대로 과보를 받는다는 것이 불가의 업보설이기에 그런 무엄한 얼굴모습이 그려져 있을까.
그러나 무사전의 지장보살의 의미는 준엄한 시왕들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지장보살은 지옥의 중생이 남아 있는 한 자신의 깨달음을 뒤로 미루고 중생을 다 구제하겠다는 원을 세운 보살이다. 그러기에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죄를 지은 자일지라도 지장보살의 구원을 기대할 수 있는 희망이 있는 것이다.
나그네는 무사전에서 이런 준엄한 심판의 인과법에 전율하면서도 지옥중생까지도 제도하겠다는 지장보살의 한량없는 자비심에서 마음이 푸근해진다
겨울 산사의 텅 빈 산길을 걸으면서 세상의 무상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우리가 겪는 인간사에서는 언제나 허무가 베어 있지만, 호젓이 혼자 걷는 텅 빈 산길에는 잠시나마 순수한 마음으로 되돌아 갈 수 있다.
이희재 명상기행집 옛절을 거닐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