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소 공간의 미학, 도산서원
퇴계의 생애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눈다.
첫째, 33세 때까지 유교 경전을 연구한 수학기
둘째, 34세 때 과거에 급제하여 49세 때 풍기 군수를 사직하고 귀향한 중년기
셋째, 50세 때부터 70세까지 높은 관직을 끊임없이 사퇴하면서 고향에 돌아와 연구, 강의, 저술에 전념했던 강학기
도산 남쪽에 자리를 얻어 자신이 직접 그림을 그려 구상하고 집 짓는 일은 용수사의 승려 법연과 그의 제자인 정일이 맡았다. 도산서당은 한일자 형태의 단순한 3간 건물이다. 3간이면 선비가 다른 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로지 학문에 몰두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으로 여겼던 것이다.
도산서당의 특징은 3면에 퇴를 달아 낸 점이다. 암서헌의 옆으로는 덧지붕을 달아 내고 마루를 연장해서 빗물이 유입되지 않도록 했으며, 이 퇴간 덕분에 완락재 북쪽에는 물건을 넣어 두는 선반을 얻었다. 기존의 3간짜리 서재 건물의 형식을 따르되 거기에 새로운 창안을 가미해서 부족한 공간을 확장했다.
선비의 절제된 품격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건물이다. 쓸데없이 과장되거나 군더더기를 덧붙히지 않았다. 간결하면서도 높은 건축적 완성도가 달성되는 데는 장인의 탁월한 안목도 필요했을 것이다. 서당이 완성되고 나서 퇴계는 주위의 담이나 문, 연못은 물론 주변 산수에도 일일이 이름을 붙이고 시를 읊어 도산잡영 44수를 남겼다.
「巖棲軒(암서헌)」
曾氏稱顔實若虛(증씨칭안실약허) 증자는 안자더러 실하면서 허한 듯이라고 일컬었는데
屛山引發晦翁初(병산인발회옹초) 이를 병산이 처음으로 회옹에게 끌어 깨우쳤네
暮年窺得岩棲意(모년규득암서의) 늘그막에야 바위에 사는 재미를 알았으니
博約淵氷恐自疏(박약연빙공자소) 박문약례(博文約禮)·임연리빙(臨淵履氷) 공부 소홀할까 두렵노라
[네이버 지식백과] 「도산잡영」 이황1) [陶山雜詠 李滉] (조선시대 한시읽기(上), 2010. 10. 8., 원주용)
도산서당 자체는 작은 3간의 건물에 지나지 않았지만 서당 주변의 자연에 각기 이름을 지어 놓고 이들을 노래한 시를 지음으로 자연물과 서당이 일체되어 하나의 인문학의 세계가 되었다. 퇴계는 치열한 학문적 열정을 안고 벼슬도 버리고 성리학을 조선 고유의 철학으로 승화시켰다. 자신이 직접 건물 평면을 구상하고 그림을 그려 도산서당도 조선 고유한 건축 세계를 창출하여 선비의 절제된 미의식과 자연을 인문학의 세계로 끌어들여 한국건축사에 큰 획을 긋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