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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정림사터의 석탑을 찾아서동양의문화와문화재/옛절을거닐며 2021. 1. 13. 13:21728x90
백제의 고도 부여는 광주에서는 두어 시간 정도, 그리움의 마음에 비하자면 그리 먼 거리는 아니다.
지나간 학창시절의 수학여행을 회상하면서 부소산과 백마강에 접어들면, 유유하게 흐르는 푸른 물에서 아련한 백제의 향기를 느낀다.
부여 읍내 중심부에 위치한 백제의 사찰, 정림사터는 산중이 아닌 평지의 중심에 있다. 절터의 한가운데 우뚝 서 있는 5층 석탑은 천년하고도 오백년의 세월을 품고 있는 장중한 백제의 석탑이다. 미륵사터의 석탑처럼 목탑의 짜임새를 가지고 있어서 단아한 분위기가 풍긴다.
이 탑의 기단부에는 당나라 소정방 일행이 백제를 평정했다는 기념으로 글을 새겨 놓았다. 이른바 ‘대당평백제탑大唐平百濟塔’으로 흔히 평제탑이라고 불리운다.
조선후기 시대의 실학자 박세당은 이 탑에 새겨진 소정방의 비문을 거울삼아, 강대한 나라에 대항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말고, 실세인 만주족 청나라와 실리 외교를 펼치자고 하였다. 큰 나라와 싸우기보다는 그 세력에 의지하겠다는 실용주의자에게 조롱당했던 이 석탑 앞에서 나그네는 쓸쓸한 마음이 된다.정림사지 5층석탑 정림사라는 이름을 되찾은 것은 불과 50여 년 전의 발굴조사를 통해서였다. 그 후에도 여러 번의 발굴이 있었고, 출토된 유물들로 미루어 이 탑은 소정방의 무리들이 세운 것이 아니라 이미 백제인에 의해 세워진 석탑에 그들이 글을 새겼음이 확인되었다. 이곳에는 석탑 이오에도 금당과 강당이 있었다고 하지만 거의 소실되었다고 한다.
이 5층 석탑의 균형 잡힌 모습이나 부여 박물관에 모셔진 미륵반가사유상 등으로 볼 때, 백제의 불교 문화재가 얼마나 우람하면서도 섬세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백제의 옛 궁성을 비롯한 여러 유물들은 거의 사라져 버렸고, 발굴되어 있는 것에도 소상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그 조성 경위 등은 베일에 가려 있다. 낙화암의 삼천 궁녀나 황벌산의 계백 장군의 이야기가 그러하듯이 정림사터도 어떤 비장함이 있다.정림사터의 석탑은 평제탑이라는 굴욕의 이름을 벗어나게 되었고, 이를 둘러싼 가람이 복원되어 가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도 스님들이 거처하지 않는 폐사지이다. 마땅히 부처님을 상징하는 신앙의 대상이 되어야 할 석탑이 그저 구경거리인 채, 승가의 귀의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 아쉬운 일이다.
평제탑이라는 굴욕의 이름에서 정림사터 석탑의 당당한 이름을 찾은 것처럼, 그리고 그 옜날 백제사람들의 기원이 헛됨이 없도록, 이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리는 이들에게 순례와 예배의 석탑이 되길 발원한다.이희재 명상기행집 옛절을 거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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