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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안사 봉화문에서
    동양의문화와문화재/옛절을거닐며 2021. 1. 10.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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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안사 대웅전

     

      태안사로 들어가는 길은 아직도 원시림이다. 숲 속의 신작로 구불구불한 길에 네 개의 다리를 건너야 한다. 사바에서 피안으로 가는 길에 비하면 가벼운 길이지만 시끄러움에 물든 도시 사람들에겐 너무 조용해서 적막한 길이기도 하다. 네 번째 해탈교를 지나 태안사 입구에 들어서면 두 길이 있다. 한 길은 6.25당시 전사한 경찰충혼탑 가는 길이고 한 길은 능파각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산 문을 들어서는 사람은 계곡을 건너지르는 능파각凌波閣으로 들어서야 한다. 한쪽은 여전히 어지러운 사바세계요, 물 건너서는 고요한 부처님의 세계이다. 잘 다듬어 놓은 돌길을 걸으면 하늘을 찌를듯한 키다리 나무들이 나그네를 반기듯 도열해 있고 그 밑에는 가을 낙엽들이 한가롭게 쌓여있다. 곡성군 죽곡면이라던가? 푸르른 산죽山竹이 수채화처럼 깔려 있다.

     

    태안사능파각 (泰安寺凌波閣) 국가문화유산포탈 문화재 검색 (heritage.go.kr)

     

      동리산의 아름다움은 계곡의 맑은 물소리가 빼어남에 있다. 폭포에서 떨어지는 거창한 물소리도 아니요, 그렇다고 답답하게 쫄랑이는 개울물도 아닌 천 년을 두고 쉬임 없이 흐르는 맑고 서늘한 계곡이 이 산의 기품을 대변한다.
      한없이 서 있어도, 한없이 거닐어도 질리지 않을 산길에서 속세의 긴장은 어느덧 사라지고, 마음은 맑고 찬 동리천의 물소리를 닮아 무심해진다.
      동리산 태안사라고 쓴 일주문에 들어서면 만감이 교차한다. 이 나라에서 산중의 사찰이 생긴 것은 통일신라시대 부터였고 그 시대의 유서 깊은 산문 가운데 하나가 이곳 동리산 아니던가. 개산조 혜철선사는 육조의 남종선을 계승한 서당 지장의 법맥을 이어받아 이 동리산에 터를 잡았다. 그는 단순한 선승만은 아니었다고 한다. 화엄경을 비롯한 대장경을 섭렵하였으며 경주의 왕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던 실력있는 스님이었다. 그의 문하의 도선국사가 풍수지리설의 비기로 고려시대 불교의 한 획을 그었지만 도선의 진면목은 동리산문의 마음 공부였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태안사 일주문

     

      도선의 풍수지리설이 있기 전부터 이미 그의 선학들은 풍수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태안사 일주문의 이름은 ‘봉황문’이니, 오동나무 숲을 상징하는 동리산에 어울리는 풍수적 운치가 있다.
      그러나 동리산의 법맥은 도선이 아닌 광자스님에 의해 이어지고 그로부터 절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봉황문 바로 옆에 부도탑들이 있다. 거기에는 이곳을 중창한 광자선사의 이끼낀 부도와 탑이 천년 고찰 태안사의 영욕을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대웅전과 천불전은 전쟁으로 불탔던 것을 근래에 복원했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을 중심으로 지장보살과 관음보살이 모셔져있다.
      대웅전 안에는 혜철과 광자와 같은 큰스님들의 높은 덕이 빛나고 있으면서도, 이곳에서는 이상하게 전쟁의 아픔이 느껴진다. 절 입구의 충혼탑 때문인지도 모른다. 본시 인간을 곱고 맑게 가꾸던 이 유서 깊은 산문안에서도 발생했던 동족상잔의 아픔 때문일까.

     

    배알문: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도록 낮게 만든 문으로 혜철스님의 부도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동리산은 태안사와 둘이 아니다. 깊은 산 그윽한 골짜기에는 구산선문의 영화가 남아있다. 옛사람들이 산과 절을 함부로 다루지 않고 신성시했던 것처럼, 지금도 태안사의 선원에서는 눈푸른 스님들과 ‘마음의 고향’을 찾는 사람들이 그치지 않는다.

     


    산을 오르다가
    내가 깨달은 것은
    말많은 세상에
    부처님도 말이 없고
    절간을 드나드는
    사람도 말이 적고

    산을 내려오다가
    내가 깨달은 것은
    이들이 모두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이 없는 세상에 
    사람보다는
    부처님이 더 말을 하고
    부처님보다는
    산이 더 많은 말을 하고 있었다.

     

    「구암리」, 1975.

     

      시인 한성기의 ‘산’을 음미해 본다.
      칠흑같은 밤길을 걸어 보아도, 별하늘을 쳐다 보아도 동리산은 뭇 생명들을 다 포용하는 듯 예나 지금이나 생기를 잃지 않고 있다.
      다시 능파각의 맑고 차거운 물소리를 뒤로 하고 산을나서면, 굽이굽이 물길이 넓어진다.
      어수선한 세상에 이런 동리산 태안사가 마지막 고향처럼 우리 곁에 있다. 

     

    이희재 명상기행집 옛절을 거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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