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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사 미륵전을 찾아서동양의문화와문화재/옛절을거닐며 2021. 1. 23. 23:24728x90
금산사 미륵전 모악산 금산사로 들어서면 맨 먼저 겨울 까치들이 나그네를 반긴다. 앙상해진 숲들은 생기를 잃었지만 산새들의 노래에서 이 산이 신선하게 살아 있음을 느낀다. 모악母岳이란 어머니 산이란 뜻으로 이 산에서 흐르는 물이 김제평야의 젖줄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금산사는 지평선을 볼 수 있는 김제평야처럼 그에 어울려 가람의 규모가 큰 곳이다. 미륵전의 3층 목조 건물은 높이에 있어서, 대적광전은 길이에 있어서 이 나라 사찰에서 으뜸이다. 이 곳의 미륵전에 들어가 미륵부처님 앞에 서면 또한 그 서른 다섯 척의 높이에 놀란다. 그 부처님은 앉아 계시지 않고 서 계신다.금산사 대적광전
금산사는 백제 법왕 때에 창건되었으니 익산의 미륵사지보다 앞서 이루어진 곳이다. 더구나 법왕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단순히 복을 받으려는 낮은 신앙에 머물지 않고 온 백성들의 마음을 닦에 하여 백성들을 교화하려고 한 왕이었다. 그가 세속의 사람들에게까지 살생을 금하게 했던 조치에서는 옷깃이 여미어지는 신심이 드러난다.
미륵부처님이 오는 세상은 적어도 그 백성들이 청정하게 계율을 지키는 생활이 바탕이 된다고 한다. 그러므로 미륵신앙과 계율을 중시한 신앙은 둘이 아닌 것이다. 나라를 잃어버린 백제의 유민들, 곧 이 지역 사람들의 절망과 불안을 달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미륵신앙과 계율중시의 삶을 복원하는 것으로 였으리라. 그러므로 이곳을 중창한 진표율사는 무엇보다도 미륵사지와 같은 큰 목조탑을 다시 세웠을 것이고 서른 다섯 척이나 되는 미륵 부처님을 모셔야 했을 것이다.
견훤의 후백제는 바로 이 미륵전을 중심으로 백제의 복구를 꿈꾸었고,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암울한 나날을 보내야 했던 민중들에게 강증산은 스스로를 이곳의 미륵부처님 화신이라 자처했다. 망국의 절망 속에서 무엇인가 새 시대를 기다리던 민초들에게 이곳 미륵부처님은 언제나 희망의 빛이었기 때문에 이처럼 거인의 모습이 아니면 안 되었으리라.
금산사의 경내에는 바위로 조성한 연화대가 있다. 그 위에 모셔져 있던 부처님의 자취는 간 곳이 없지만, 그 규모는 미륵전의 모든 것과 어울린다.
흐린 세상에 살면서도 거기에 물들지 않고 맑고 향기로운 연화대를 떠났는지 모르겠다. 이곳 연화대를 떠난 미륵님은 다름 아닌 우리 곁의 이웃들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조선의 지조있는 생육신의 한 사람으로 스님이 되었던 김시습은 금산사의 정취를 이렇게 노래한다.
넓은 계곡에 구름이 아득하고
숲과 돌들 사이로
물소리 여울진다.
하늘의 별들이 절을 밝히고
저문 밤 바람서리
연화대를 둘러싼다.
지금의 금산사는 월주 스님의 원력으로 옛 규모들을 거의 회복했다. 그리고 아직도 금산사 주위에는 미륵부처님과 관련된 신종교의 교단들이 성스러운 당으로 그 신앙을 잃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땅의 민중들과 애환을 함께 한 이 모악산도 향락문화와 이기적 탐욕에 의해 오염되어 가고 있어서 안타깝다. 머리 않아 금산사의 사하촌에는 놀이시설과 관광단지가 들어선다고 한다.
침묵이 필요할 때 찾아야 할 산길을 우리는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정작 우리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향락과 유희가 아니라 절제와 침묵임을 다시 생각해 본다.이희재 명상기행집 옛절을 거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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