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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 양림동 정자 양파정
    한국의 美/한옥 2021. 1. 3.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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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림동 이장우 가옥 처마 밑에서

     

     양림동은 '최부자집-최승효가옥'과 '이장우 가옥'이라는 고택이 유명하다. 최부자집은 현재 일반에게 공개를 하지 않고 있다. 현재 양림동의 상징과 다름없는 고택은 '이장우 가옥'이다. 이장우 가옥은 1899년 정병호라는 분이 지었다. 정병호는 당대에 독일유학을 다녀왔다. 당시 서울에도 몇대없는 그랜드피아노가 있었고 그 집에는 모든 음악이 있었다고 할 정도로 음악에 조회가 깊으신 분이었다고 한다. 

     

     

    양림동 이장우 가옥 안채

     

     정병호의 아버지 참봉 정낙교는 조선말기 양림동에 주식회사 양파농장을 운영하는 광주의 큰 부자였다. 정낙교는 시무에 조예가 깊어 광주천이 굽어보이는 곳에 '양파정'을 짓고 시인, 묵객과 교류했다. 매년 양파정에서 전국 한시 백일장을 열어 양파정시단을 형성하여 당시에 모아진 시는 '양파정시고'로 발행되어 광주군(현: 광주광역시)에 기증되었다. 

     농성동 광장에는 '전 참봉 정낙교 시혜비'가 서있다. 대지주였던 정낙교는 소작농민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으로 기억된다고 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인 1937년 2월 1일, 소작 농사일을 하던 당시 극낙면, 서창면, 송정면, 동곡면, 하남면, 비아면 소작농 사람들이 세운 비석이라고 전해진다. 조선말 참다운 부자로써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조선말 선비가 아니였나 싶지만 당시 소작농민이 무슨돈으로 그런 비석을 세워줬는지 궁금하다. 

     

     

    양림동 양파정

     

     양파정의 주인 정낙교의 외손자는 차이코프스키의 직계 4대 제자로 알려진 '검은머리의 차이코프스키' 정추이며, 정추의 동생 정근은 '둥글게둥글게', '솜사탕',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좋겠네'를 만든 동요작가이다. 이들의 음악성은 외삼촌 정병호의 영향을 많이 받은듯 하다. 

     현재 양파정은 광주광역시에 기증되었지만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왔다. 원형 그대로의 모습인지는 알 수 없으나 쇠난간 위에 입힌 적색페인트 모습이 어색했었다. 알고보니 양파정 안의 시문에는 일제 식민 통치 협력자인 친일 반민족 행위를 한 친일인사의 시문이 걸려 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에 지었으며, 1932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르고 있다는데 이유있는 방치가 아니었나 싶다. 한강에는 압구정이 있고 광주천에는 양파정이 있다는데, 지역에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는 정자가 많아서 정자의 의미와 역사를 알지 못하면 방문해도 알 수 없는 곳이다. 흉측한 쇠난간이 거슬리는 정자일 뿐이다. 

     

     

     

     양파정은 고려말 광주천 홍수를 다스린 석서정을 추억하며 지어졌다는데 차라리 원래 위치에 석서정을 복원 해봄이 어떨까 싶지만, 아픈 역사도 역사인만큼 우리가 보존해야 할 문화재다. 

     시문에 남아있는 광주천의 풍광은 상상속으로도 그려내기 힘들다. 광주천에서 수영하고 놀았다는 삼춘세대의 이야기도 내가 살면서 바라본 광주천에서는 믿기지 않는 옛날 이야기일뿐이다. 

     

     

    양파정 안의 여러 개의 시문에는 일제 식믹통치 협력자인 정봉현, 여규형, 남기윤, 정윤수 친일 반민족 행위를 한 친일인사의 시문이 걸려있어 2020년 8월 13일 양파정에 친일 행위를 알리는 단죄문이 설치되어 있다. 

     

     "양파정에 오르면 언제나 심신에 많은 위안을 얻었다. 집안에만 있어 우울할 때는 문득 지팡이를 짚고 정자에 올라 스스로의 즐거움을 느끼곤 한다. 하늘은 아침저녁으로 모이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는 각양각색의 구름들이 천태만상을 이루고 있다. 위에서 아래도 흐르는 시냇가에는 헤아릴 수 없는 많은 낚시꾼들이 서로 자리를 다투며 앉아있다."

    [출처] 양파정 주인 정낙교.. '시문학을 통해 위안과 대안을 찾다'|작성자 양림통신

     

    진짜 선비들의 정자는 

     

    보고 또 보아야 안목이 생긴다는 한국의 美 진정한 정자 명승 제40호 소쇄원

     

     조선 초기에는 개인적인 정자를 짓는 것은 고관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그러나 15세기 후반부터는 중소 지주 계층들도 고관들의 생활을 모방해서 집 주변이나 인근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짓는 것이 서서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만큼 지방 각지에 이런 정자를 지을 수 있는 경제력을 가진 계층이 널리 확산되었던 것이다. 

     16세기에는 사림이라고 부르는 선비 집단이 형성되어 학문 탐구를 일생의 과업으로 삼으면서 과거시험을 통해 정계에 진출해서 자신들의 생각을 실천하거나 처음부터 욕심을 갖지 않고 지방에 은거하면서 학문 탐구와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인 선비들을 지칭한 것이 사림이었다. 

     사림들은 주자의 성리학을 추구하였고, 지방의 중소 지주 계층이 되어 향촌에서 일정한 지배력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경제력과 지배력이 자신들의 건축물을 지을 수 있는 바탕이 되었다. 

     그들이 동경하는 주자는 때때로 관직에 나가 자신의 뜻을 펼치기도 했지만 만년에는 무이산에 들어가 무이정사를 짓고 그 곳에서 후진을 양성하면서 자연 속에 묻혀 시를 짓고 살았다. 많은 선비들이 고향 주변 경승지를 찾아 그 곳에 무이정사와 유사한 정사를 짓거나 정자를 짓고 그 곳에서 은거하면서 시 짓고 학문 탐구로 낙을 삼았다. (김동욱, 조선시대 건축의 이해,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5, 123~12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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