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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남산 송광사동양의문화와문화재/옛절을거닐며 2021. 1. 7. 12:37728x90
종남산 송광사 일주문 산의 색이 더욱 푸르른 6월의 날씨는 길을 떠나는 사람에겐 더 없이 좋다. 전주에서 멀지 않은 종남산 기슭의 송광사는 깊은 산사가 아닌 마을과 더불어 있는 당당한 모습의 절집이다.
장흥 보림사를 창건한 체징스님 그리고 순천 송광사를 창건한 보조국사께서 이미 절의 터를 닦아두었지만 옛절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다고 한다. 그 옛터에 다시 오늘의 모습으로 개창한 분은 벽암 각성대사이다.
삼국이래로 왕실은 몰론 국민의 종교였던 불교가 조선조에 이르면서 위축되고 심지어 서울의 출입까지 제한하던 어두운 시절에, 이런 대규모의 가람이 섰다는 것은 놀랍기만 하다. 불교의 명맥이 단절되기는 커녕 오히려 부처님의 가피력을 통해 구국의 의지를 태운 이 터에는 조선후기의 암울한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벽암 각성은 청나라 태종의 병자호란을 마구니의 소행으로 간주하고, 이를 물리치기 위한 항마군을 만들어 국가와 왕실을 결연히 수호하려 했던 분이 바로 이 터를 다시 세운 각성대사였다. 일찍이 남한산성을 축조하는 책자로 있다가 오랑캐들의 국토유린을 좌시하지 않고 승군을 모은 스님의 의기야말로 위축되었던 불교의 위상과 역할을 높힌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송광사 대웅전에 모셔진 삼존불은 6미터가 넘는 웅대한 규모다. 법당의 반 상을 차지한 높고 큰 삼존불 앞에서면 대륙의 무뢰한 침략자에게 조금도 굴함이 없었던 승군의 기상을 보는 듯 하다.
인조와 왕비의 무병장수와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의 안전 귀환을 기원한 글을 세긴 삼존불 앞의 고색창연한 목패가 400년이 되어 가는 오늘에도 그 때의 비원을 절절히 전해 주고 있다.
오랜 평화를 누리던 산하가 외세의 침략에 의해 유린당하고 성들이 불안의 나날을 보고 있을 때, 깊은 산에 은둔하여 수행하던 스님들이 수행자 본의 자세를 박차고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용기는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각성스님은 삼천 명에 가까운 의승군들에게 세 가지 지침을 당부했고 한다. 생각을 망녕케하지 말 것, 얼굴을 부끄러이 하지 말 것, 그리고 허리를 펼 것을 계율처럼 지키도록 했다고 한다. 당당하고 거침없는 각성스님의 선풍을 가늠하게 하는 지침이다.
속세의 욕망과 시끄럼이 깊숙히 들어선 오늘에 있어서도 종남산 송광사는 보조국사 지눌의 자취와 국가존망의 위기에서 심약하지 않고 국태민안을 기원하고 실행한 조선 후기 의승군의 의로운 향기가 베어 있다.이희재 명상기행집 옛절을 거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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